top of page


사랑하기에 아깝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14장에는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한 여인이 순전한 나드 향유가 담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쏟아붓는 장면이 나옵니다. 일 년 치 품삯에 해당하는 값진 향유를 아낌없이 드리자, 어떤 이들은 이를 “낭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고 하시며, 온 천하에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도 기억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내어주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그것은 물질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기쁨, 마음을 나누는 교제, 곁에 머물고 싶은 바람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여인이 깨뜨린 옥합 역시 단순히 값비싼 물건을 드린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한 사랑을 아낌없이 표현한 헌신으로 다가옵니다. 그런 사랑은 억지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할 때,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옵니다. 주님께 받은 사랑이 얼마
-
10 hours ago2 min read


온전히 맞이하는 자리로
마가복음 11장의 한 장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겉옷을 길에 펴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복되시도다” 외쳤습니다. 그 환호 속에는 기대와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같은 도시에, 같은 시간에 모든 이가 그렇게 맞이하진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분을 거부했고, 어떤 이들은 환영하면서도 자기 삶의 한 부분만 내어주었습니다. 기적은 보고 말씀은 들으면서도 자기 권위와 삶의 주도권만큼은 지키려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능력이 자기들이 세워 온 질서와 권위를 흔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는 질문은,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기보다 판단하는 자리에 서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일부분은 받아들이지만 그 이상을 내려놓기는 원치 않았던 마음. 어쩌면 그것은 특별한 악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익숙하게 살아가는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오늘날도 비슷한 자리가 있습니
-
1 day ago2 min read


더 높이보다, 더 가까이
열심히 했는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괜찮다고 생각하다가도, 나보다 주목받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복잡해집니다. 누군가를 위해 한 일인데 어느새 ‘내가 이만큼 했다는 걸 알기나 할까?’ 하고 기대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을지 신경 썼습니다. 함께하는 사람을 동료가 아니라 경쟁자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전혀 다른 기준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힘을 행사하지만, 너희 가운데서는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자주 묻는 질문은 “어떻게 하면 더 인정받을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질문의 방향을 바꿉니다. “지금 내 곁에는 어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을까?” 관심의 중심이 나에게서 이웃에게로 옮겨 가는 순간입니다. 높아져서 얻는 기쁨보다 섬김으로 얻는 기쁨이 더
-
2 days ago2 min read


기도,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삶
마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미 권세를 받았고, 귀신을 쫓아낸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이 오늘의 순종과 능력을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이 더 나은 기술이나 자신감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기도였음을 일깨워 줍니다. 받은 권세와 이루어 낸 일보다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지금도 붙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생명을 공급받듯이, 우리도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기도는 바로 그 붙어 있음을 확인하고 이어 가는 일입니다. 내 힘만으로는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과 교제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쉬
-
3 days ago1 min read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
마가복음 8장 27절에서 33절은 예수님의 정체성과 메시아의 길을 묻는 핵심 본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세례 요한, 엘리야, 또는 예언자 중 하나라고 대답했습니다. 모두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질문을 좁히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은 군중 여론이 아니라 각 사람의 신앙 고백을 요구합니다. 베드로는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 자체는 정확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예수님은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을 비로소 드러내셨습니다. 메시아의 정의를 바로잡은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능력으로 다스리는 왕이 아니라, 고난 받고 죽는 종이라는 역설입니다. 베드로는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붙들고 말렸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아
-
4 days ago1 min read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귀신과 병 고침을 받은 이들에게 “입을 다물라”고 명령하셨을까요. 마가복음 1장을 읽다 보면 그 침묵의 명령이 반복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귀신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고백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병 환자에게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주님은 단순히 자신의 정체를 숨기신 것이 아닙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를 로마의 압제를 물리치고 나라를 회복시킬 강력한 왕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기적을 보고 “이분이 메시아시다”라고 선포된다면, 그 이미지가 고정될 위험이 컸습니다. 능력과 성공, 해방의 표상으로만 남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오해를 막으셨습니다. 정체성의 완전한 계시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과한 뒤에야 뒤에야 가능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기적을 베푸시는 분, 병을
-
Oct 161 min read


가서, 관계를 맺고, 한 걸음 더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 산에서 제자들을 만나셨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7절에는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를 보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사람들인데도 의심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을까요. 믿는다고 고백하면서도 “정말 주님이 함께하실까”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 마음이 든다고 해서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연약함까지 알아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주님이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은 먼저 의심을 책망하시거나 완벽한 믿음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여기서 잠시 멈추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가
-
Oct 152 min read


피하는 기도와 맡기는 기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기도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지나가게 해 주소서”라는 솔직한 간구입니다. 예수님도 피하고 싶고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으셨고, 그 기도를 세 번 반복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을 어려움을 없애 달라는 기도로만 이해하기 쉽습니다. 병, 양육의 지침, 깨어진 관계 앞에서 “이것만 지나가게 해 주세요”라고 부르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에는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라는 더 깊은 말씀이 있습니다. 피하는 것과 맡기는 것 사이의 간격이 바로 신앙의 자리입니다. 이민자의 삶에도 겟세마네의 잔이 많습니다. 언어의 벽, 긴 노동, 양육의 고통, 고향을 떠난 외로움. 지나가고 싶은 잔들이지만, 하나
-
Oct 142 min read


겉과 속이 조금씩 어긋날 때
마태복음 23장에서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여러 차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그들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려 하면서 속은 점점 비어가는 모든 마음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율법을 가르쳤고, 남들 앞에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헌금을 드렸습니다. 문제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 선 것이 아니라, 사람 앞에 서려는 마음이 되어버린 데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도 비슷한 간격이 있습니다. 주일에는 말씀을 듣고 은혜를 나누면서, 평일에는 작은 거짓과 불평, 남에 대한 미움을 그냥 두고 사는 일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보이고 싶은 마음이 커지면, 기도도 봉사의 기록도 어느새 내가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수단이 됩니다. 또 다른 사람의 신앙은 세세히 살피면서, 정작 내 마음의 탐욕이나 분노는 슬쩍 덮어두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모습을 향해 화를 말씀하셨지만, 동시에 그 마음을 되돌릴 길을
-
Oct 132 min read


하나님 사랑, 나와 이웃에게로
율법사가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세 가지 사랑을 생각합니다. 하나님 사랑, 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어느 것이 쉽고, 어느 것이 어려울까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어떻게 드러날까요?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일상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사람을 대하는 모습에서입니다. 바쁜 하루 속에서도 하나님을 먼저 생각할 때, 사랑은 삶의 자리를 찾아갑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나를 대하는 마음도 돌아보게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
-
Oct 121 min read


이미 주어진 표적
우리는 날씨를 꽤 잘 읽습니다. 저녁 하늘이 붉으면 “내일은 맑겠구나” 하고, 아침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궂겠구나” 합니다.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하십니다. 하늘 모양은 분별하면서 시대의 징조는 분별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표적을 구하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 사흘을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죽임을 당하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눈을 끄는 이적이었지만, 예수님이 가리키신 표적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었습니다. “이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다음입니다. 메시아로 인정받는 자리에서, 그 메시아
-
Oct 91 min read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마태복음 14장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드는 질문입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바구니가 남았습니다. 이어 예수님은 거센 바람이 부는 바다 위를 걸어오십니다. 그런데 성경은 떡이 어떻게 늘어났는지, 어떻게 물 위를 걸으셨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과정을 알아야 안심합니다. 치료는 얼마나 걸리는지, 부족한 돈은 어디서 마련할지, 꼬인 관계는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고 싶습니다. 길이 보이지 않으면 마음부터 흔들립니다. 믿음도 종종 “해결 방법을 보여 주시면 믿겠습니다”라는 조건부 약속이 됩니다. 그러나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빛이 있으라” 말씀하셨고, 빛이 있었습니다. 성경이 먼저 보여 주는 것은 빛이 생기는 과정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분의 권능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턱없이 부족한 음식이었지만, 주님의 손에서는 많은 사람을 먹이는 선물이 되었습니다. 물 위
-
Oct 81 min read


말씀이 머물 나를 돌보다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무리를 보시고 밭을 보셨습니다. 길이 있고, 돌이 있고, 가시덤불이 있고, 좋은 땅이 있었습니다. 같은 씨가 떨어졌는데 땅이 달랐습니다. 씨는 하나님 나라의 말씀이고, 밭은 그 말씀을 받는 마음입니다. 길가에 떨어진 씨는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고, 표면에만 머물다 빼앗깁니다. 돌밭은 잠깐 기쁘지만 흙이 얕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환난이 오면 곧 넘어집니다. 가시덤불 밭은 말씀을 듣지만,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함께 자라 말씀을 숨 막히게 합니다. 말씀이 틀린 것이 아니라 우선순위에서 밀려난 것입니다. 좋은 땅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그 안에 머물게 하여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완성된 땅은 아닙니다. 묵은 땅을 갈고 돌을 골라내며 가시를 살피는 일이 필요합니다. 다만 그 작업이 씨를 받기 전에 내가 먼저 끝내야 하는 자격은 아닙니다. 길이 다 갈아엎어지고 돌과 가시가 없어진 다음에야 말씀을 받을 수 있다면, 좋
-
Oct 72 min read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5–30절에서 예수님은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신 아버지께 감사하십니다. 또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신에게 맡기셨다고 말씀하신 뒤, 우리를 이렇게 초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 쉼은 단순히 잠깐 쉬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무게를 주님께 맡기고, 마음 깊이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저마다 짐이 있습니다. 일과 생활의 걱정, 어려운 관계, 건강 문제, 실패의 아픔이 우리를 지치게 합니다. 자녀를 키우는 일도 큰 기쁨인 동시에 무거운 책임입니다. 아이의 건강과 진로를 걱정하고, 어떻게 이끌어야 할지 고민하며, 때로는 ‘내가 잘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자녀를 사랑하기에 그 걱정을 쉽게 내려놓지 못하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짐도
-
Oct 62 min read


감출 수 없는 감사와 기쁨
마태복음 9장 27–31절에서 예수님은 눈먼 두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신 뒤,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기적 자체에만 관심을 두고 예수님을 잘못 이해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소문과 열광보다, 사람들이 참된 믿음으로 당신을 만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앞을 보지 못했던 두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둠 속에서 살았습니다. 얼굴도, 길도, 세상의 빛도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말씀하신 순간, 그들의 눈이 열렸습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했고, 막혀 있던 삶의 길도 새롭게 열렸습니다. 그들에게 이 일은 마음속에 조용히 숨겨 둘 수 있는 작은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쁨이 먼저 밀려왔고, 감사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자연스럽게 말이
-
Oct 52 min read


내 사랑하는 아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이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예수님의 공생애는 놀라운 일을 보여 주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아들로 인정하시고 사랑하신다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이루셨기 때문에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아들이셨습니다. 그런데 곧 광야에서 시험이 받습니다. 마귀는 같은 말을 다르게 사용합니다.“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지금 증명해 봐라. 배고프면 돌을 떡으로 만들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하나님이 지켜 주시는지 보여라. 세상을 얻고 싶으면 내게 절하라. 예수님은 능력이 없어서 거절하신 것이 아닙니다. 아들 되심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배고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앞세우셨고, 하나님의 보호를 시험하지 않으셨습니다, 천하를 얻는 것보다
-
Oct 21 min read


신약성경 읽기 시작
마태복음은 신약의 첫 책이지만, 구약과 끊어진 새로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오래전부터 주신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보여 주는 복음서입니다. 본문에는 저자의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지만, 교회는 오래전부터 세리였던 사도 마태의 기록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적 배경을 지닌 독자들을 향했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으로 열립니다. 그러므로 마태복음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이 중요한 까닭은 구약을 지나간 이야기로 남겨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을 모른 채 예수님을 이해하려 하면, 그분이 이루신 약속의 깊이를 충분히 보기 어렵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연결을 보는 것은 성경 지식을 늘리는 일만이 아니라, 약속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
Oct 12 min read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
창세기에서 시작된 긴 이야기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약속이 뿌려지고, 광야를 지나고, 성전이 세워지고 다시 일어나는 길을 함께 걸어왔습니다. 이제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는 오랜 여정 끝에 하나님이 건네시는 마지막 인사이자, 다음 장을 여는 문입니다. 말라기는 구약과 신약을 잇습니다. 하나님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하시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리라고 약속하십니다. 구약은 그 약속으로 마지막 장을 덮습니다. 그 후 약 사백 년 동안, 새로운 선지자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 기다림의 끝에서 세례 요한이 등장합니다.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광야에서 길을 곧게 하라 외치며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킵니다. 그리고 그 길이 열리는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십니다. 구약이 “오실 분”을 가리키며 문을 닫았다면, 신약은 그 문이 활짝 열리며 “그분이 오셨다”고 시작합니다. 말라기
-
Sep 301 min read


찔린 그를 바라보게 하소서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스가랴 12장 10절) 하나님은 먼저 은혜를 구하고 용서를 비는 영을 부어주십니다. 그다음에야 사람들이 찔린 그를 바라보고 슬퍼합니다. 오래 믿은 우리에게도 이 순서는 같습니다. 신앙 연수가 길다고 해서 십자가가 저절로 새로워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주셔야 우리는 다시 주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19장은 예수님의 옆구리가 창에 찔린 장면을 이 말씀의 성취로 기록합니다. 우리의 죄만이 아니라, 익숙해진 예배와 식은 마음도 그분을 찌를 수 있습니다. 신앙의 위기는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습관이 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
Sep 292 min read


나귀 타고 오신 왕 앞에서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당시 사람들이 기다리던 것은 병거와 군마를 이끄는 해방자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 왕은 나귀 새끼를 타고 들어왔습니다. 공의로우신 분, 구원을 베푸시는 분, 그러나 낮아지신 분. 예수님은 그 예언을 예루살렘 길 위에서 이루셨습니다. 스가랴는 그 왕을 더 폭넓게 알려줍니다. 왕이자 제사장인 ‘싹’은 “은 삼십”에 팔린 목자(11장), 찔린 자(12:10), 칼에 쳐진 목자(13:7). 호산나 뒤에 거부가 있으며, 예루살렘 입성 뒤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날”에 찔린 이를 바라보고 애통하며 죄 씻는 샘이 열리고(13:1), 여호와께서 천하의 왕이 되십니다(14:9). 나귀 탄 그날은 그 큰 날의 문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같은 유혹 앞에 섭니다. 더 빠르고 센 구원,
-
Sep 281 min read
bottom of pag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