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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
에스겔 47장은 성전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오기 시작됩니다. 발목에서 무릎, 허리로 깊어지다 마침내 헤엄쳐야 건널 강이 되고, 광야를 지나 죽은 바다를 살립니다. 강가에는 열매가 끊이지 않는 나무가 자랍니다. 죽음이 지배하던 자리에 생명이 흘러드는 환상입니다. 이 말씀은 포로 중의 이스라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요? 성전은 불탔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것을 그들은 이미 들었습니다. 땅도 왕도 제사도 끊긴 채, 바벨론 강가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르지 못했습니다. 그런 백성에게 “성전에서 물이 나온다”는 환상은, 무너진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선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 임재에서 나온 생명이 죽은 민족과 땅을 살린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큰 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강은 제국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에게서 온다는 뜻이었습니다. 자연에서 비는 하늘에서 내리고 샘은 땅에서 솟습니다. 우리가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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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hours ago2 min read


말씀하시면 살아납니다
에스겔 36장에서 하나님은 이미 약속하셨습니다.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주시며,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살게 하리라. 37장은 그 약속을 눈으로 보여 주는 환상입니다. 골짜기에는 아주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탄식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우리 뼈가 마르고 소망이 끊어졌다. 우리는 끊어졌다.” 완전한 죽음처럼 보이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 뼈들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게 하십니다. 말씀이 임하자 뼈가 서로 맞닿고 힘줄과 살이 붙습니다. 그러나 아직 생기가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영을 사방에서 불러 그 속에 넣으십니다. 그들이 큰 군대로 일어납니다. 그리고 선언하십니다. “내가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살아나게 하고, 그때에야 너희는 나 주가 말하고 그대로 이루는 하나님임을 알리라.” 이 환상을 통해 주시는 말씀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생명을 받은 자이지 주는 자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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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days ago2 min read


돌 같은 마음에 새겨지는 하나님의 은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반복되는 실수와 죄, 상처와 분노, 고쳐지지 않는 습관 때문에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가 많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변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깊어지면 변화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고 체념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과 완고함을 모르지 않으십니다. 결심하고도 다시 넘어지는 우리의 모습을 아시기에, 단지 더 강한 의지로 노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친히 우리 안에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시고 우리를 도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에스겔 36장에서 하나님은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새 마음을 주시며, 자신의 영을 우리 안에 두어 하나님의 뜻을 행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변화는 더 강한 결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그분의 도우심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변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며 절망하거나 쉽게 포기하지 마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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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days ago1 min read


열정의 크기가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은 집집을 방문하며 「파수대」를 전합니다. 어떤 동네에서는 자주 보는 장면입니다. 그 열정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질문은 열정의 크기가 아니라, 무엇을 전하고 있는가입니다. 에스겔 33장 11절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삶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무너지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잘못된 길에서 돌아와 살기를 기뻐하십니다. “돌이켜라. 그 길에서 돌아오너라.” 이것은 차가운 책망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초청 앞에서도 끊임없이 반대로 행했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라도 살리기를 원하셔서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알림은 밀어내는 선언이 아니라, 생명으로 오라는 초청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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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days ago1 min read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두로 왕은 바다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습니다. 배가 드나들고, 은과 금이 쌓이고, 지혜롭다는 평판이 사방에 퍼졌습니다. 어느 순간 그는 그 풍요를 자기 본질로 착각했습니다. "나는 신이다." 하나님이 주신 자리와 재능과 타이밍을, 그는 자기 신성으로 번역해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왕관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문장을 다른 방식으로 되뇌입니다. 내 판단이 틀릴 리 없다. 내 성공은 내가 설계했다. 내가 무너지면 주변도 무너진다. 그 마음 바닥에 흐르는 속삭임은 하나입니다. "이 자리의 주인은 나다." 하나님은 두로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거짓 신을 그대로 두면 사람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기에 그 말씀을 깨뜨리십니다. 이집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다는 바로의 군대를 구원자처럼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팔을 부러뜨리십니다. 사람이 신이 되어 다른 사람을 떠받치면, 그 지팡이는 결국 손을 찌를 뿐입니다. "너는 사람이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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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 12 min read


이번 주, 물 아래를 들여다보는 시간
지난 주일 설교에서 사울이 한 말, “나는 순종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설교를 다시 듣고 묵상하며, 그 말씀을 내 삶으로 가져오길 바랍니다. 거창한 결심은 필요 없습니다. 다만 한 지점을 정직하게 바라보면 됩니다. 첫째, 이번 주 하나님이 건드리시는 한 가지를 적으십시오. 미뤄 둔 용서, 얼버무린 말,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피한 순종, 바쁘다는 이유로 덮은 기도. 사울의 문제는 전부 버린 것이 아니라 일부를 남긴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대개 그 한 조각에서 무너집니다. 둘째, 입에서 나오는 포장하는 말을 살펴보십시오. “사역을 위해서”, “관계를 위해서”, “나중에 하면 되지.” 경건해 보이는 이유가 실제로는 청종을 미루는 변명일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이 나오거든 잠시 멈추고 이렇게 물어보십시오. “지금 나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가, 아니면 내 목소리를 주님의 이름으로 입히는가.” 셋째, 그 자리를 십자가 앞에 짧게 가져가십시오. 빙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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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311 min read


잘되면 조상 덕, 안되면 조상 탓
바벨론 포로들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조상 탓이다. 그들이 잘못해서 우리가 고생한다." 그 말에는 상처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에는 책임에서 빠져나가려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우리도 비슷합니다. 일이 잘되면 조상 덕, 안되면 조상 탓. 집안과 환경이 분명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의 최종 설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에스겔 18장에서 하나님은 그 생각을 분명히 거두십니다.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다고 아들의 이가 시는 것이 아닙니다. 조상이 실패했어도, 각 사람은 자기가 행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남의 죄가 나를 대신해 죽이지 않고, 남의 의가 나를 대신해 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가문의 그림자 속에 묶어 두지 않으시고, 오늘 이 자리에서 응답하는 사람으로 대하십니다. 묵상의 중심은 18장 30절입니다.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심판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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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82 min read


용서 앞에서 잠잠해지는 은혜
에스겔 16장은 듣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사랑으로 일으키셨는데, 그 사랑이 배신을 당합니다. 59절에서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은즉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상처받은 사랑의 공의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 말씀이 "그러나"로 열립니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언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 사람이 먼저 잘해서 하나님이 돌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배반이 드러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이 옛사랑을 기억하십니다. 우리가 언약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붙드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패턴을 발견합니다. 공의가 먼저 선언되고,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자비가 열립니다. 그리고 그 자비는 우리의 회개나 성실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배반이 드러난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이 먼저 옛사랑을 기억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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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72 min read


아, 그래서 그랬구나!
바벨론에 이미 포로로 와 있던 사람들은 마음속에 깊은 질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왜 우리 민족만 이렇게까지 멸망하고 고통을 당해야 하나? 하나님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것 같다는 원망이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하나님은 먼저 재앙의 규모를 분명히 하십니다. 전쟁과 기근, 사나운 짐승과 전염병이 한꺼번에 임하면, 노아나 다니엘, 욥 같은 의인이 그 땅에 있어도 자기 목숨만 건질 뿐이고, 자녀도 건질수 없다. 개인의 의로움으로는 공동체를 살릴 수 없을 만큼 심판이 철저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극심한 재앙 속에서도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바벨론으로 끌려옵니다. 이미 와 있던 포로들이 그들의 실제 삶, 우상 숭배하는 모습과 죄악의 실체를 직접 보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아! 이래서 하나님이 예루살렘에 이런 재앙을 내리신 거구나, 이유 없이 하신 게 아니었구나” 하고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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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61 min read


새 영을 주리라
기독교는 인간이 만든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꿈과 환상으로 계시하시고, 기록하게 하신 종교입니다.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사람들은 "설마 그렇게 될까?" 의심했지만,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선택받은 민족이면서 가장 많은 책망을 받은 이스라엘.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반드시 회복시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회복은 땅의 회복이 아니라, 영적인 회복이었습니다.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내 율례를 따르며 내 규례를 지켜 행하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영은 주로 소수에게만 임했습니다. 사울과 다윗에게 기름 부으실 때, 선지자들에게 사명을 주실 때처럼 특별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영을 모든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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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52 min read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자리
에스겔이 본 환상은 이미 바벨론 포로로 잡혀 온 백성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조국이 무너지고 자신들이 포로가 된 이유와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의 영적 상태를 전혀 알지 못한 채, 단순히 정치적 패배나 운으로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통해 성전 안의 가증한 우상숭배를 낱낱이 드러내셨고, 나라가 기울고 포로가 잡혀가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우상을 섬기는 실체와, 그 죄가 예배의 타락을 넘어 피 흘림과 성읍의 불의로 이어졌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어 여호와의 영광은 성전 문지방에서 동문으로, 마침내 성읍 동쪽으로 단계적으로 떠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죄 때문에 무력하게 떠나신 것이 아니라, 끝까지 회개를 거부한 백성을 향해 임재의 복과 보호를 거두시는 거룩한 심판의 표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지 “왜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는가”를 묻기보다, 우리의 예배와 삶 가운데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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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41 min read


하나님의 본심을 알면
예레미야 애가는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이 무너진 뒤, 백성들이 경험한 깊은 슬픔과 절망을 담은 책입니다. 삶의 터전이 무너지고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현실 앞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멀리하신 것처럼 느낍니다. 그 처절한 아픔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책의 중심인 3장에서는 놀라운 전환이 일어납니다. 고통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고통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성품을 다시 기억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애 3:22-23). 상황은 여전히 어렵고 눈물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붙잡았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포기하지 않으시며, 그분의 긍휼은 매일 아침 새롭게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하나님만은 우리의 가장 귀한 소망이 되어 주십니다.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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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11 min read


말씀과 상징으로 깨우시는 하나님
예루살렘이 이미 공격을 받고 왕과 지도자들, 에스겔까지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갔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듣기를 거부한 백성을 깨우시기 위해 하나님은 에스겔의 몸 전체를 메시지로 사용하셨습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두루마리를 먹었습니다. 입에는 달았지만 그 안에는 심판의 말씀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는 390일과 40일 동안 옆으로 누워 죄를 담당했고, 제한된 음식으로 기근의 고통을 보여 주었습니다. 또 머리와 수염을 깎아 불태우고, 칼로 치고, 바람에 흩는 행동으로 예루살렘의 심판을 눈에 보이도록 선포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처럼 강렬한 방식으로 말씀하셨을까요? 백성의 마음이 너무 완고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고, 경고를 받아도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눈으로 보고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도록 깨우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큰 어려움을 지나며 “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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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201 min read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있을 때, 성전은 무너지고 나라는 망한 암울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반역하는 백성에게 보내노라.”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은 침묵하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세우셨습니다. 1장에서 에스겔은 네 생물과 눈 가득한 바퀴들, 그 위 영광스러운 보좌, 보좌 위에 앉으신 하나님을 봅니다. 이 환상은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다.” 포로의 땅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은 빛나고, 그분의 보좌와 주권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2장에서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가시와 찔레 가운데 있어도 두려워하지 말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따뜻한 위로이면서 부드러운 경고입니다. 위로는 이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바벨론’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희망이 없고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 같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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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92 min read


그래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오늘의 성경읽기는 예레미야서의 끝 부분입니다. 예루살렘은 불타오르고, 성벽은 무너지며, 백성들은 세 차례나 포로로 끌려갑니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은 처참합니다. “이제 정말 모든 것이 끝났다”는 탄식이 절로 나올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절망의 한가운데서, 예레미야가 40년 동안 눈물로 외쳤던 메시지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옵니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유다가 멸망한 것도, 바벨론이 흥한 것도, 결국 다 그분의 손에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죄를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예레미야는 평생을 바쳐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완악한 마음이 오늘날 우리의 마음과 너무도 닮아 있지 않습니까? “아직 괜찮다, 나중에 회개하면 되지” 하는 그 안일함이, 결국 성전을 불태우고 포로로 끌려가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그 자리에, 하나님은 희망을 심어 놓으셨습니다.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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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81 min read


영원한 언약으로
예레미야 50장은 바벨론의 무너짐을 선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큰 심판의 이야기 한가운데에는, 심판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흩어지고 상처 입은 자기 백성이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자손들은 함께 돌아옵니다. 그들은 울면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리고 시온을 향해 얼굴을 돌리며 고백합니다. “우리가 잊히지 않을 영원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다시 연합하자.” 그들은 오랫동안 길 잃은 양처럼 살아왔습니다.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고, 강한 나라들의 힘 아래 상처 입고, 때로는 하나님을 잊은 채 방황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양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목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단지 한 제국의 멸망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거대한 권세 아래 눌리고 울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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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72 min read


말씀보다 앞서는 두려움
예레미야 40–42장은 바벨론의 침공 이후,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남은 유다 백성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 보여 줍니다.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은 그 땅에 남은 사람들을 위해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웠고, 백성은 그를 중심으로 다시 삶을 이어 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왕족과 유다 사람들은 그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달리야를 죽이고 사람들을 사로잡는 비극을 일으켰습니다. 그 후 그들은 예레미야에게 나아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약속합니다.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우리가 순종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 땅에 머물러라. 내가 너희를 세우고 지키겠다.” 하나님은 두려움 속에 있는 백성에게, 도망치지 말고 그분을 신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백성은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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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42 min read


하나님의 뜻과 나의 마음이 부딪힐 때
하나님의 뜻과 내 마음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순간을 만납니다. 하나님, 이것이 정말 주님의 뜻입니까? 제 마음은 아직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왜 꼭 이 길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한데, 우리의 마음은 두렵고 복잡할 때가 있습니다. 내려놓으라는 말씀 앞에서는 더 꼭 붙잡고 싶고, 기다리라는 말씀 앞에서는 조급해집니다. 용서하라는 말씀 앞에서는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우리를 붙듭니다. 유다 백성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바벨론에 항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라를 포기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심판 가운데서도 백성을 살리시고 장차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의 마음에는 그 말씀이 너무도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항복은 패배처럼 보였고, 자존심을 내려놓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두려움과 분노, 억울함이 그들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레미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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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32 min read


말씀 앞에서 갈라지는 마음
예레미야 36장 내용은 예레미야가 쓴 두루마리 성경을 바룩이 읽자 고관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옷을 찢고 반응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야김 왕은 달랐습니다. 그는 말씀을 조금씩 칼로 잘라 화로에 던져 태워 버렸습니다. 같은 말씀인데, 어떤 이는 생명을 얻고 어떤 이는 거부로 응답합니다. 영화 '신의 악단'은 이 장면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보여 줍니다. 북한 보위부가 지원금을 받기 위해 만든 가짜 찬양단. 그들은 진짜처럼 보이려고 찬양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기도합니다. 처음에는 완벽한 연기였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반복해서 읽고 찬양을 부르다 보니, 어느 순간 심령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가짜로 시작된 입술이 조금씩 진실한 고백으로 바뀌어 갑니다. 물론 모두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는 말씀 앞에서 마음이 녹지만, 어떤 이는 “이건 그저 작전일 뿐”이라며 끝까지 마음을 닫습니다. 오늘 우리도 비슷합니다. 매일 설교를 듣고 묵상하며 찬양을 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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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22 min read


부르짖으라, 내가 보이리라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예레미야 33:2-3) 예레미야는 시위대 뜰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은 바벨론 군대에 포위되어 무너질 위기에 놓였고, 선지자의 메시지는 외면당했습니다. 모든 것이 절망으로 보이던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일을 행하시고,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라고 소개하시며 예레미야를 향해 “부르짖으라”고 초청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시며, 뜻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신다는 선언입니다. “크고 은밀한 일”은 우리의 지혜와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회복의 길입니다. 모든 것이 끝난 듯한 예루살렘을 향해서도 하나님은 치료와 회복, 용서와 기쁨을 약속하셨습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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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 111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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